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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련재] 32.네가지 지향 양보하고​ (리광인)

潮歌家族 潮歌网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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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인 실화련재 아,나의 중학시절이여


제5부 네가지 지향


네가지 지향 양보하고


1970년 12월 10일, 중학교 3학년 1반 졸업학급 공청단원들인 허경철, 김창규, 오옥분, 김봉금과 나 중학교 시절 기념사진을 남기며. 김봉금씨는 여태 소식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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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네가지 지향이 있다고 하니 졸업반 친구들 가운데는 뒤문을 찾으며 움직이는 친구들도 없지 않았다. 그때 담임교원 임상운선생님은 나를 찾으면서 자기를 찾거나 련락하는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가끔 있다면서 나의 조언을 바랬다. 나는 뒤문거래로 졸업배치를 정하지 말아야 한다, 평소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보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선생님은 옳다고 하시면서 얼마후 나를 다시 찾으시였다. 


“광인이는 졸업반 가운데서도 1호가는 학교학생간부이고 가장 우수한 동무이니 가장 좋은 곳을 우선적으로 선택할수 있어. 그런데 교육부문에서는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다 보내지 말고 일부는 본보기로 새농촌건설에 내세우라고 요구하니 누구를 농촌에 보내야 할가, 참 머리가 아파.”


“머리가 아플것이 있어요? 제가 고향마을로 돌아 가겠습니다!”

“네가? 안돼. 아버지 없이 가정생활도 어려운데 이런 기회에 좋다는 중등전업학교에 가야지.”

“아닙니다. 나부터 좋은 곳을 선택하면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해요?! 제가 귀향하겠습니다. 이미 사상준비가 되였어요.”

그러면서 나는 나의 한편의 일기를 선생님에게 보여 드리였다.


졸업하게 되면 나는 광활한 천지 농촌으로 와 3대혁명중에서 나 자신을 단련하며 모택동시대의 신형의 농민으로 되겠다.

                                               ㅡ1970년 6월 8일


“광인이는 일찍부터 귀향을 결심하고 있었구나. 진짜 보통이 아니지.”

“농민의 아들이 귀향하는건 응당한 일이 아니에요?!”

“후회하면 어떻해?”

“저에게 후회란 있을수 없어요. 저대신 학급간부들인 오옥분이나 허경철을 좋은데로 보내세요.”


이렇게 나는 졸업반 학생들 가운데서 선참으로 귀향을 자보했고, 솔선적으로 “농촌에 뿌리박고 한평생 혁명하겠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써붙이였다. 이 일은 학교 사생들과 졸업반 친구들 가운데서 강렬한 반향을 자아냈다. 내가 제일이라는 친구도 있었고, 리해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송병천 서기를 비롯한 학교당지부에서는 나의 결심을 지지하여 나섰다. 


1970년 12월 10일, 화룡현 토산중학교 공청단지부와 학생회 친구들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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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기 네가지 지향(선택)을 보면 중등전업학교들인 길림시화공(化工)기계학교, 길림시 길림철도국기공(技工)학교, 교하탄광학교, 장춘전력(电力)학교, 연변사범학교, 연변사범학교 세린하분교, 연변위생학교, 길림시야금(冶金)학교 등등을 비롯하여 개산툰팔프공장, 화룡 송하평백화상점 등으로 아주 많았다. 한족반까지 졸업반 3개반 86명 학생중 24명이나 네가지 지향에 갈수 있었으니, 4분의 1에 달하였으니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학교의 요구로 선생님들을 도와 학생배치사업을 도와 나섰다. 이런저런 우수한 학생들을 뽑고도 명액이 나마 돌았다. 그 다음은 표현이 일반적이라는 학생들가운데서 약간명을 뽑게 되였는데 나의 추천으로 일부 중등전문학교와 개산툰팔프공장 등으로 간 학생들도 있으니 그들은 근 50년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나의 추천으로 네가지 지향에 선택되고 인생이 바뀌였음을 모르고있다. 문화혁명후 중학교졸업생들로 말하면 1970년 우리 초중졸업생들에게만 차례진 유일무이한 졸업배치였다.


어느날, 나의 중소학교 동창이고 중학교 학생회와 학급의 주요간부인 오옥분이 나를 찾았다. 그는 그 시절 류행되는 일기책을 졸업기념으로 선물하면서 속셈을 터놓았다. 


“광인이 너 때문에 내가 연변사범학교로 가게 되는구나. 너 아니면 내가 선참 귀향자보대상이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한테는 네가 천생 교원감으로 보이거든.” 

“고마워. 우리의 우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

“나도 그래. 너는 나의 절친한 친구지. 학생회나 학급의 사업에서 우린 너무도 잘 어울렸구, 학교선전대도 둘이서 손잡고 꾸렸잖아.”


3년제 초중졸업을 앞두고 나눈 나와 오옥분 동창의 이야기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뜻대로 연변사범학교로 갔고 졸업후에는 그 시절 화룡현 숭선향 대동학교에 배치되였다. 숭선의 대동촌과 그 시절 내가 생활하는 화룡현 광평농장은 30여리를 사이둔 거리여서 나는 숭선으로 오가면서 옥분친구를 여러번 만날수 있었다. 후일 오옥분은 연길로 전근하고, 나도 후일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일보사 편집기자로 뛰면서 우리 자주 어울리였다.


중학교 시절 지창룡과 사촌형 리정운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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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졸업이 귀향으로 결정되면서 나는 일기에 나의 마음을 담아보았다. 


당은 나를 3대혁명의 제1선으로 부르고있다. 광활한 천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때 나의 심정은 더없이 격동된다. 어느덧 중학문을 나서게 되는 나는 나를 길러주신 모주석과 당의 은덕에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사회주의 새농촌의 아름다운 원경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당은 나를 준엄히 고무하고있다. 당의 수요는 바로 나의 지원이며 3대혁명의 수요는 바로 나의 출발점이며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곳, 가장 간고한 곳은 바로 나의 지향이다. 나는 지향의 보물고 향해 매진하련다. 


당은 나를 농촌에 가 혁명할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당에서 나에 대한 최대의 관심, 최대의 배려라고 본다. 나는 당의 배려를 거대한 동력으로 삼아 광활한 천지에서 자신을 단련하며 광활한 천지에서 꽃피워 자신을 진정 공농병이 환영하는 사람으로 개조시키겠다.


ㅡ1970년 12월 15일


위대한 70년대를 펼치면서 나 중학교 시절의 마지막 한편의 일기인 것 같다. 나의 결의는 드팀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1978년 나라의 개혁개방 전후에 이르기까지 네가지 지향으로 추천선발된 학생들과 고향마을로 돌아간 학생들의 사이는 같은 초중졸업생일 뿐이지 실제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중등학교에 간 친구들은 졸업후 여러 직장에 배치되여 로임생활을 하며 완연 다른 인생길을 걸었지만 귀향한 친구들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그럭저럭 살아갔다. 후에 호도거리 농사를 지으면서부터는 나름의 인생을 헤쳐 나가야 했다.


나의 인생길은 우리 화룡현 토산중학교 1970년 중학졸업생들과 같지않은 나만의 나름의 인생길이였다. 그 시절 중학교 선배후배들을 통털어도 유일무이한 우리만의 중학졸업생 국가배치ㅡ네가지 지향(四个面向),선참으로 선발되여 갈수있는 네가지 지향을 동창친구들께 양보하고 선참으로 대자보를 써붙히며 귀향을 선택하였다. 


그로부터 장장 50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1970년 12월의 그번 졸업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그번 선택이 표면으로 보면 내가 많이 밑지는 인생장사를 한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세상 리치는 요지경이라고 그번 선택은 나의 인생길을 달리하면서, 화룡현 광평농장, 화룡2중(고중), 다시 광평농장을 거치면서 중학교졸업 8년후 나를 연변대학 조문학부 대학생으로 만드는 인생전환 계기로, 인생갈림길로 오늘의 내가 있도록 하였다. 


그시절 네가지 지향으로 갔더면 나의 삶은 대학아닌 또다른 평범한 길을 걷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진솔한 마음이다.


중학교 졸업하면서 네가지 지향(四个面向) 마다하고 환고향 했다가 해군으로 참군한 친구 박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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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은 나 생애 잊지 못할 뜻깊은 나날인것 같다. 중학교지도부에서는 나를 “5호학생”이라고 표양하면서 “실천론”과 “모순론” 등으로 무어진 붉은 보서ㅡ “모주석의 5편철학저작”을 증송하였다. 졸업을 앞둔 그 나날을 쪼개여 가면서 우리 졸업반 친구들은 서로 일기책 선물을 건네면서 기념사인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도 유감도 없지 않다. 어찌보면 평생유감으로도 되였으니 우린 본의아니게 졸업반 기념사진을 찍지 못하고 중학교 졸업증도 가지지 못했다. 신경이 잔뜩 살아난 우린 담임교원 임상운선생님을 찾았다. 임상운선생님도 결단하지 못하신다. 그래서 나와 학급 반장 허경철 그리고 김창규 등은 학교 혁명위원회 주임인 송병천선생님을 찾아갔다. 


송병천선생님은 단번에 손사래를 친다. 못찍는다는 리유를 차근차근 설명하는것이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졸업반사진은 이 시대의 풍조가 아니니 “너희들이 사진을 찍겠다면 내가 엉덩이를 들이밀겠다.”며 엄포를 놓으셨다. 중학교 1인자인 송병천선생님은 이같이 우리 1970년도 토산중학교 3개반(조선반 2개반에 한족반 하나) 80여명 졸업생들에게 한늬(평생) 유감을 남긴 분으로 우리 기억에 남았다. 


중학교 졸업하면서 네가지 지향(四个面向)으로 상업계통에 진출한 리렬웅친구


중학교 졸업시절 인상이 좋지 않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때로부터 근 50년 세월이 흐른 최근년간에야 알게 된 바이지만 우리 1970년 중학교졸업생들이 졸업사진을 찍지 못한건 송병천선생의 잘못이 아니였다. 세상은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고 지난 이태간 청도에서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우리 후배 송학웅씨를 만났는데 송학웅씨 아버지가 바로 송병천선생님의 아드님이였다. 청도에도 계시다가 몇해 전에 별세하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졸업사진을 찍지 못한 원인은 화룡현교육국의 통일지시란다.


알고보면 화룡현교육국만의 지시가 아니였다. 우리 글 잡지 “청년생활” 2019년 제12기에 오른 작가 리경자씨의 글ㅡ“내 청춘은 저 산 너머에”를 보노라니 리경자씨도 1970년 중학교졸업생인데 옛날 룡정현 동성용중학교(다닌 학교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음)에서도 졸업사진을 찍지 못하였다고 한다. 졸업사진 뿐아니라 졸업식도 가지지 못하고 중학교졸업장도 받지 못하였다. 


오, 그랬구나, 이러고보면 1970년도 생 우리들이 졸업사진 한장 찍지 못한건 화룡현교육국만의 지시가 아닌 연변 각현시 교육국의 통일행동으로  보여진다. 아니, 개별학교들을 제외한 전국의 많고많은 1970년 초중졸업생들은  졸업사진 한장 찍지 못하고 졸업증을 타지 못하였다. 우린 이같이 졸업반 전체사진도 남기지 못한 유감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야 했다. 비정상 년대의 비정상적인 일이였다. 


불행중 다행이라 할가. 우리 토산중학교 단지부와 학생회 , 학급간부들 , 동창친구들끼리의 기념사진은 찍을수가 있어 소중한 기념으로 남았다. (계속)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1부 어엿한 중학생 중학교 시절 첫 시련/뢰봉ㅡ빛나는 본보기/또 하나의 영웅인물 구양해/그는 리과 나는 문과/작문 그리고 시쓰기/만인갱 참관과 창규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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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중학교 발자취 양금월 찾아 100여리1/양금월 찾아 100여리2/송병천 교장1/송병천교장2/두 담임선생님/토산농중과 초대교장/셋째 형 리광오1/셋째형 리광오2

제5부 네가지 지향 전일제 첫 중학생/1970년 시절 특수군체/네가지 지향 양보하고/우리 반장 경철이/나의 소꼽 친구들/ 그날의 그 사인들1/그날의 그 사인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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